색다르게 역사 맛보기, 역사의 인과론
정형화 되고 겉으로 들어난 역사는 획일적이고 무미건조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 색다르게 역사를 맛본다면 어떨까요?
이런 이야기는 겉으로 드러난 팩트가 아니더라도 그냥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어느 정도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자 그러면 색다른 역사 맛보기를 해볼까요?
삼국시대로 올라갑니다.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해서 어떻게 통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망국의 통일이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지만, 어쨌던 역사의 팩트는 당과 연합해서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렸습니다. 신라와 당은 연합은 했지만 서로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신라는 당을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하는 꿈을 꿨고, 당은 신라와 연합해서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신라까지 집어삼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신라와 당이 연합할 수 있었을까요?
겉으로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가능하게 한 바탕에는 두 민족의 동질성이 있기 때문이죠.
신라의 김씨는 북방 흉노 좌현왕의 아들인 김일제의 후손이고, 당을 세운 이씨는 북방 유목민족인 선비족입니다.
신라가 북방 흉노의 후손이라는 것은 제가 쓴 다른 글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나라 말기 위오촉 삼국시대에 위나라가 통일하고 이어 진(晉)나라가 들어서는 혼란기에
선비족들이 대거 북중국으로 밀고 내려오면서 5호 16국 시대가 열리죠.
이후에 남북조시대가 되고 수나라가 남북조시대를 통일하게 되는데, 수⦁당은 모두 선비족입니다.
흉노와 선비족은 북방의 유목민족이라는 동질성을 가지고 있는데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보면 고조선과 연결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후한서』를 보면 ‘선비와 오환은 모두 동호(東胡)의 후예다’라고 했습니다.
동호(東胡)는 고조선을 말하는 건데요, 그러니까 선비족은 고조선의 한 족속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흉노의 시조는 고조선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이암의 『단군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흉노와 선비는 같은 뿌리에서 나오는 동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동질성 때문에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는 조합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묘호란을 일으켜 우리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준 후금은 조선과 형제관계를 맺게 됩니다.
후금이 명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이제 형제니까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도와주지도 말아라” 그런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지만,
특히 형제관계를 맺게 된 것은 그런 역사적인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후금은 나중에 청나라가 되는데요, 후금의 전신은 금나라입니다.
금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죠.
그런데 금나라의 시조는 누굴까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첫째 아들인 마의태자의 후손이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금(金) 나라의 정사(正史)인 『금사金史』 「세기世紀」를 보면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函普인데, 처음에 고려에서 왔다(金之始祖諱函普, 初從高麗來)”고 하고,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옛날 평주(함경도 영흥)의 승려 금준(今俊)이 도망하여 여진으로 들어가
아지고촌에 살았는데 이 사람이 금나라의 선조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청나라 때 만주족인 여진족이 자신들의 원류를 정리하기 위해 편찬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신라 왕의 성 김씨가 수십 세 전해졌고
금(金)이 신라로부터 왔으니, 의심할 바 없이 그가 세운 나라의 이름도
마땅히 김씨 성을 취한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라 왕의 성씨인 김씨를 가진 사람이 여진족의 땅으로 와서 금나라 시조가 됐다고 여진족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금나라 시조를 마의태자 후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때 당시 여진족 땅과 가까운 지역에서 신라 부흥을 위해 활발히 활동한 사람이
마의태자이기 때문입니다.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할 때 적극적으로 반대한 인물이 마의태자입니다.
그는 신라 천년 사직을 경솔하게 넘겨줄 수 없다고 반대하다가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 마의를 입고 풀을 먹고 살다가 죽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강원도 인제 지역에서 신라부흥운동을 합니다.
강원도 인제에는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해주는 지명과 유적, 유물들이 적잖게 남아 있습니다.
마의태자를 의미하는 김부리(金富里)와 김부대왕각,
마의태자의 광복운동을 암시하는 다물리(多勿里),
갑옷을 입고 진을 친다는 갑둔리(甲屯里) 등
마의태자가 이곳에 와 머무르면서 신라를 재건하고자
군사를 모집해 길렀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많이 전해옵니다.
결국, 마의태자의 신라부흥운동은 실패했지만 그의 후손 중에 누군가 여진족 땅으로 건너가
금나의 시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금나라, 청나라는 고려나 조선에 대해서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면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