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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태조 ‘누르하치’ 한번에 보기

청태조 누르하치한번에 보기

 

명은 여진족 거주지에 관할 범위에 따라 100호의 소所와 1000호의 위衛를 두었는데요,

누르하치가 등장하던 때에는 모두 384개의 소와 24개의 위가 설치되었습니다.

여진의 여러 부족 중 하나인 건주여진은 건주위, 건주좌위, 건주우위로 분화되었는데, 1559년 이 건주좌위 추장 가문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납니다. 후에 청태조가 되는 누르하치입니다.

 

누르하치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체격이 건장해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에 능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10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손에서 자라면서 어린 시절 온갖 고초를 겪으며 자랍니다.

 

백두산 인근에서 인삼을 캐고 버섯을 따며 개암과 잣송이를 주워 팔아 가며 연명하기도 하는데요,

후에 무역을 하는 상인이 됩니다.

 

25살 되던 1583년 그의 인생을 뒤바꾸는 중요한 사건이 터지는데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명의 장수 이성량(李成梁)에게 목숨을 잃고 맙니다.

이성량은 고조부가 조선 출신이라고 하며,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였던 이여송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명에 충성했지만, 결국 죽임을 당한 사건을 목도하면서 누르하치는 격분하였고 마음 속으로 다짐을 합니다.

 

복수전으로 시작한 누르하치는 힘을 키우면서 신속히 건주여진을 통일해 나갔고, 6년에 걸친 노력 끝에 마침내 건주여진의 5개 부족을 통합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런 누르하치에게 만주를 완전히 통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오게 되는데요,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입니다.

명이 조선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만주에서는 큰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해서여진 4부와 몽골의 코르친(科爾沁) 부족 등 ‘9개 부족 연합군’ 3만 명과 누르하치 군대가 격돌한 것입니다.

누르하치에게 큰 위기의 순간이기도 했지만, 이 전쟁에 승리한 누르하치는 만주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조선에서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가장 큰 혜택을 본 것이죠.

 

1616년 1월 1일 누르하치는 마침내 국호는 ‘후금後金’, 연호는 ‘천명天命’으로 하고 칸(汗)에 즉위합니다.

이에 더 이상 여진의 성장을 두고 볼 수 없던 명은 1619년 10만여 명을 동원하여 후금을 공격하게 되는데요,

이 전쟁에 명의 요청에 의해 강홍립이 지휘하는 조선군 1만 명도 참여하게 됩니다.

 

무순의 동쪽에 위치한 사르후(薩爾滸)에서 명明과 후금後金의 국운을 건 전투가 벌어지는데요, 누르하치는 네 갈래로 진격해오는 명의 군대를 각개 격파하여 완전히 승리하게 됩니다.

이후 명은 요하 서쪽으로 물러나고 다시는 요동으로 나오지 못하게 돼죠.

 

 

누르하치는 후금 건국 10년을 맞이한 1626년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으로 들어가 위해

산해관을 지키는 영원성(寧遠城) 공격하게 되는데요,

이 전투에서 생애 첫 패배를 하게 됩니다.

당시 영원성을 지키는 장수는 명의 이순신이라고 불리우는 원숭환(袁崇煥)입니다.

전투 중 홍이포 파편에 부상당한 누르하치는 얼마 후 68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