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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이순신, 원숭환

명의 이순신, 원숭환

 

누르하치는 만주를 장악한 뒤에 요동까지 손아귀에 넣습니다.

그리고 힘을 축적한 뒤에 중원으로 진출하고자 만리장성의 동쪽 관문인 산해관을 넘으려 합니다. 하지만 산해관 앞에 영원성이 버티고 있어 공격은 실패하고 맙니다.

 

당시 영원성을 지키는 명의 장수는 원숭환(袁崇煥)이었습니다.

명나라 말기 후금의 공격으로부터 명을 지켜낸 조선의 이순신과 같은 인물입니다.

원숭환은 중국 남방 광둥성 동관 출신인데요, 36세에 겨우 과거를 통과했을 정도로 대기만성 인재였습니다. 그는 문관이지만 늘 병서를 읽고 퇴직한 무장들과 교유하면서 군사 전략을 논하는 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원숭환의 담력과 지략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나자 명 조정은 그를 병부의 관리로 선발했죠.

 

이때는 후금이 요동을 점렴하고 산해관까지 압박하던 절박한 시점이었습니다.

이후 원숭환은 산해관 일대를 스스로 답사한 뒤,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는 전방에 야전 초소를 설치하여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전략을 제안합니다.

당시 병부상서인 손승종(孫承宗)은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그에게 산해관 바깥에 위치한 영원寧遠과 전둔위前屯衛의 군대 지휘권을 줍니다.

원숭환은 관외를 지켜야만 관내 방어가 가능하다며 산해관 동북방의 영원에 큰 성을 쌓고 당시 신무기였던 포르투갈산 홍이포를 배치했습니다.

 

홍이포는 서양식 켈버린 대포로 명은 이 무기를 1618년 처음 입수하였고, 1621년에는 자체 제작 기술을 습득했습니다. 유효 사거리는 700~800미터이고, 최대 사거리는 4킬로미터에 달하는 당시로는 최신식의 강력한 대포였는데요, 후금의 팔기군은 영원성 전투에서 이 홍이포에 혼이 나 패배의 쓴잔을 마셔야 했습니다.

누르하치도 홍이포의 파편에 부상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게 돼죠.

 

그런데 1629년 후금이 하북성 영평永平에서 홍이포 장인을 찾아낸 뒤에 1631년 마침내 홍이포까지 주조하게 됩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이 홍이포를 가져와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후금은 영원성에 원숭환이 있는 한 만리장성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이간책을 씁니다.

당시 명나라 조정은 환관 위충현(魏忠賢)이 전횡을 휘두르는 등 말이 아니었죠.

누르하치를 이어 칸이 된 홍타이지는 명의 환관을 매수하여 원숭환이 후금과 내통하여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말을 퍼뜨렸습니다.

결국 원숭환은 모반 혐의로 잡혀 1630년 능지형에 처해집니다.

 

원숭환이 살아있는 한 요서 방어선의 돌파는 불가능하다고 했던 조국 명나라를 지켜냈던 명장 원숭환은 이렇게 억울하기 그지없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14년 뒤 명은 멸망하고 맙니다.

 

장수는 전쟁터에서 죽는 것이 가장 영광스럽다고 했는데,

금나라에 대항해 남송을 지켰던 악비(岳飛)가 간신 진회(秦檜)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듯 원숭환도 간신에 의해 허무하게 희생당하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