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를 전성기로 이끈 황제들
1626년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는 10년 만에 후금(後金)에서 대청(大淸) 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가 되었습니다. 중원 정복의 대계를 마련한 뒤, 산해관을 넘기 직전에 승하했습니다.
홍타이지 집권 초기 후금은 군사적으로 명을 제대로 위협하지 못하고 경제 기반이 허약하여 위기를 맞았지만,
이런 막막한 상황에서 홍타이지와 만주족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답답하고 암울한 상황에서도 홍타이지는 대국 명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창업주를 능가하는 창업 정신을 가진 홍타이지였습니다.
청 3세 황제는 천리에 따라 순조롭게 나라를 다스려 대통일을 이룩한다는 의미의 순치제(順治帝)입니다. 순치제는 홍타이지의 9번째 아들로 홍타이지가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추대에 의해 즉위하게 됐습니다. 즉위 당시 6살이라 당시 실력자인 삼촌 예친왕 도르곤과 정친왕 지르갈랑의 보좌를 받았습니다.
1644년 이자성의 반란군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명의 숭정제(崇禎帝)는 목을 매고 자결했는데, 스스로 대장군에 오른 섭정왕 도르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총 14만 명의 팔기군을 이끌고 산해관으로 진격했습니다.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吳三桂)는 당초 이자성에게 항복하려 했는데, 자신의 애첩 진원원(陳圓圓)을 이자성의 최측근 유종민이 납치해 가자, 청군에 항복하고 산해관의 문을 열었습니다.
역사에서 일어나는 큰 사건들은 어떨 때는 이렇게 작은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자성의 군대는 갑자기 눈앞에 가득 찬 만주 팔기군에 의해 무너졌고,
청나라는 드디어 베이징을 비롯한 북중국을 장악했습니다.
상황이 정리된 가을 도르곤은 어린 순치제를 심양에서 베이징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자금성에서 황제 등극식을 열어 대륙의 주인이 청나라 임을 만천하에 알렸습니다.
순치제 초기 7년은 숙부 도르곤이 실권을 지니고 있었기에, 직접 다스린 친정 기간은 10년 정도 됩니다.
그사이 남명(南明)의 영력제(永曆帝)를 잡아와 목을 베어 명의 잔존 세력을 대부분 평정했습니다.
하지만 순치제는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24살에 천연두로 죽고 맙니다.
순치제에 이어 셋째 아들이 8살로 즉위하게 되는데 바로 강희제(康熙帝) 입니다. 총명한 강희제는 14살 때 섭정대신으로 권력을 휘두르던 오배(敖拜)를 몰아내고 친정을 시작했습니다.
19세 때에는 강남의 3분의 2를 점령했던 삼번왕三藩王(청에 항복했던 오삼계, 상지신, 경정충)을 9년에 걸쳐 진압하여, 더욱 강력한 중앙집권화 정책을 펼침으로써 중국 전역을 진정으로 지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주족과 한족의 통혼을 금지해 만주족 지배층을 온존시키는 한편,
팔기에 속한 군인으로 기사(騎射)에 능하지 못하면 엄벌에 처하는 등
상무 정신을 고취시켰습니다.
여기에 한족 인재 등용을 신중히 하였고, 강희자전(康熙字典)과 같은 여러 편찬 사업에 한족 지식인을 참여시켜 딴마음을 품지 못하게 했습니다. 강희제는 9번에 걸쳐 강남 지역을 순방하여 지방관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민심을 살폈고,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여 현재와 같은 중국 영토의 틀을 확보했습니다.
강희제가 재위 61년인 69세에 승하하자, 치열한 경쟁을 뚫고 넷째 아들이 즉위하니 그가 옹정제(雍正帝) 입니다. 성실하고 치밀했던 옹정제는 강희제 말년에 나타난 재정 악화 등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여 태평성세가 이어지게 했습니다.
특히 그는 엄청난 양의 일 처리를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조그만 현의 문서에도 황제가 붉은 글씨로 쓴 조칙인 주비(硃批)가 남아 있을 정도로 꼼꼼한 인물이었습니다. 13년 정도로 상대적으로 짧은 치세였지만,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강희제와 건륭제 시대를 잇는 아주 뛰어난 제왕이었습니다.
옹정제의 뒤를 이어 넷째 아들 건륭제(乾隆帝)가 즉위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해 할아버지 강희제가 가장 총애한 손자였습니다. 조부 강희제의 재위 기간인 61년을 넘게 재위함을 꺼려 재위 60년에 퇴위하고 태상황제가 되는데, 89세에 사망할 정도로 장수합니다.
조부 강희제 때부터 이어진 재정적 축적을 계승하여 제국은 안정되었고, 문화적으로도 최고의 성숙함을 보여 주는 등 청 제국 최전성기를 이룩했습니다.
초기에는 내치에 힘썼고, 후반기에는 현재의 신장 자치구 지역인 준가르 평정과 위구르, 타이완, 미얀마, 베트남, 네팔 등을 원정하는 10회에 걸친 무공을 세웁니다. 국내 순방도 자주 다녔고, 고증학의 번영을 배경으로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펴내고 명사(明史)를 완성하는 등 문화 사업도 활발하게 펼칩니다.
이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를 잇는 3대 138년은
청이 가장 번성하던 강건성세(康乾盛世)의 시기로 평가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