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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의 정복자 ‘살라딘’

관용의 정복자 ‘살라딘’

 

이슬람 국가 IS나 테러를 일으키는 극단적인 이슬람 세력을 보고 이슬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기가

쉬운데요, 그렇게 보이는 건 선입관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슬람에도 훌륭한 지도자가 있습니다. 바로 관용의 정복자 ‘살라딘’입니다.

 

11세기 말 가톨릭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는 한마디로 제1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고 십자군은 지중해를 건너 이슬람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왕국을 세웠습니다.

그러자 이에 맞서 이슬람 세력도 결집하기 시작했고 백여 년의 시간이 지난 뒤에 이슬람에 십자군에 맞설 수 있는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납니다. 그는 바로  ‘살라딘’입니다.

 

그렇자면 살라딘은 어떤 인물일까요?

 

살라딘은 1138년 지금의 이라크 북부인 타크리트에서 태어납니다.

그는 쿠르드족 명문 장군 집안 출신입니다.

본명은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Salah ad-Din Yusf ibn ayyub, 욥의 아들이며 정의로운 신앙인인 요셉이란 뜻)입니다. 이름이 엄청 길죠?

 

영웅으로 칭송받는 살라딘은 의외로 그의 외모는 영웅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왜소한 체격에 내성적이며 종교적인 심성이 강하며 사려 깊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탁월한 지도력과 군사적 역량으로 이슬람 세력뿐 아니라 서방 세계에도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당시 탐욕스럽고 무자비했던 십자군 군주들에 비해 온건하고 신의가 있는 자비로운 군주로

덕망이 높았으니까요.

 

그러면, 살라딘은 어떻게 이슬람의 최고 지도자가 됐을까요?

 

1168년 이집트 파티마 왕조가 내분에 휩싸입니다. 무함마드의 계승자로 이슬람교를 수호하고

이슬람 공동체를 통치하는 지도자이자, 종교상 최고 권위자인 칼리프와

실질적인 통치자인 재상 사이에 불화가 생긴 겁니다.

그러자 이집트는 당시 이라크 북부와 시리아 등을 지배하고 있던 셀주크계 장기 왕조의 제2대 술탄이었던

누레딘에게 원군을 요청합니다.

 

당시 이집트는 시아파고 누레딘은 수니파의 최고 실력자였습니다.

누레딘은 이집트를 수니파로 만들고 십자군 세력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살라딘의 삼촌인

시르쿠를 파견합니다.

이때 살라딘도 삼촌인 시르쿠를 따라 함께 이집트로 가게 됩니다.

 

파견된 시르쿠는 이집트에서 재상이 됐는데 두 달 뒤 갑자기 사망합니다.

그리고 31세 밖에 안 된 살라딘은 삼촌을 이어 재상에 취임하게 되죠.

그리고 또 이집트의 칼리프가 죽게 되는데요, 그러나 살라딘은 다음 칼리프를 옹립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권력을 잡고 통치권을 행사합니다.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고 천운이 있어야 되는데요,

그런 면에서 살라딘은 영웅의 조건을 타고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살라딘이 이집트의 실권을 잡고 세력을 키워 가면서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이지 않자

누레딘은 오히려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살라딘을 제거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는데요, 그런데 이것도 천운인가요?

그런 와중에 누레딘은 급사하고 맙니다.

살라딘은 이집트의 술탄이 되어 아이유브 왕조를 세운 뒤에 이후 누레딘 세력까지 흡수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이루려고 했던 사업에 착수하게 되는데요,

전 이슬람 세력을 합쳐 예루살렘에서 십자군 세력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기독교의 성지이면서도 이슬람에게도 아주 중요한 성지입니다.

이슬람의 가장 중요한 성지는 메카이며, 그 다음은 예언자 마호메트가 죽은 장소인 메디나,

그리고 마호메트가 하늘로 승천했다고 전해지는 바위가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살라딘은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을 궤멸시키고 예루살렘으로 공격해 들어갑니다.

살라딘의 군대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쉽게 무너질 것 같았는데, 의외로 방어를 잘합니다.

발리앙의 지휘로 잘 버텨내는데, 그를 주인공으로 만든 영화가 2005년에 나온 <킹덤 오브 헤븐>입니다.

물론 그 영화에서도 살라딘의 모습이 잘 그려지고 있죠.

 

그래도 끝까지 버티기에는 역부족입니다.

함락되는 순간 발리앙은 대담하게 협상을 제안합니다.

성안의 이슬람교도를 모두 죽이고, 모든 이슬람 성소를 파괴하고 전원이 죽겠다 그렇지 않으면 협상하자는 거죠.

 

살라딘은 기독교도뿐 아니라 이슬람교도의 피로 물들고 파괴된 예루살렘을 얻을 순 없었습니다.

성안 모든 사람들의 몸값을 받는 조건으로 협상에 응합니다. 하지만 몸값 일부만 낸 사람도 풀어 주었고,

오히려 몸값이 없는 노인이나 여인, 고아는 당장 필요한 돈까지 주며 예루살렘을 떠나게 했습니다.

이 모든 비용은 살라딘 자신의 주머니에서 충당하고 여기에 어떤 약탈 행위도 금지시키고,

떠나는 예루살렘인들을 지켜 주며 안전한 곳으로 보내 주었습니다.

이렇게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차지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의 함락은 유럽 사회를 경악에 빠뜨렸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이슬람의 지도자 살라딘에 대한 소문도 퍼졌습니다.

정작 그는 싸움을 즐기지 않고 사람들의 신망을 얻었으며 포로들에게 관대하다고 칭송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예루살렘을 이슬람에게 빼앗긴 유럽은 가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제3차 십자군 원정이 시작됩니다. 당시 유럽 최강국인 프랑스, 잉글랜드, 신성로마제국(독일)의 국왕이

직접 참전합니다.

제3차 십자군 원정을 이끈 인물은 잉글랜드 국왕으로 사자왕이라고 불리던 유명한 리처드 1세입니다.

그는 사람들을 압도할 만큼 큰 키, 유달리 긴 팔과 다리, 떡 벌어진 어깨,

사자 갈기 같은 붉은색이 감도는 금발을 지녔는데, 영락없는 영웅의 모습이죠.

 

리처드는 그 전의 실패를 교훈 삼아 철저한 준비를 합니다.

그동안 주먹구구식으로 그냥 믿음에 의지해 나아갔던 역대 십자군과 달리 잘 조직화된 십자군을 꾸려

원정을 떠납니다.

영웅 대 영웅의 대격전이 벌어집니다. 일전일퇴를 하지만 십자군이 좀 더 우세하게 밀어 붙입니다.

하지만 보급이 순탄하지 않고 여기에 심한 폭우와 사막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십자군은 병사 수가

3분의 1로 줄어들게 됩니다. 또한 동생 존이 프랑스의 필립 2세와 짜고 왕위 찬탈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리처드는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됐습니다.

전투는 승리했지만 예루살렘 탈환은 실패합니다. 하지만 1192년 살라딘과 리처드는 휴전 협정을 맺고,

아크레를 포함해 야파에서 티레까지 이어진 지중해 연안 항구 지역의 십자군 영토를 존중하되

예루살렘은 이슬람교도의 통치하에 두게 됐습니다.

아울러 비무장한 기독교도 순례자가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성지 통행을 할 수 있게도 됐습니다.

 

살라딘은 리처드와 화약을 맺고 5개월이 지난 1193년 다마스쿠스에서 55세를 일기로 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는 다마스쿠스의 거대 모스크 사원 옆 묘지에 묻혔는데, 일생 독실한 이슬람교도로 살았기 때문에

재산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살라딘은 관용적이면서 신의가 있고 정의롭게 통치한 이슬람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