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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디아’와 고구려, 신라

‘소그디아’와 고구려, 신라

 

고대나 중세에는 자동차나 기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가장 빠른 이동 수단은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구촌의 각 민족이 서로 왕래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도 있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나라는 서로 왕래할 수 있었겠지만 멀리 떨어진 나라와는

교류가 거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역사의 흔적을 살펴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은 교통이 훨씬 더 발달해서 쉽게 다른 나라로 갈 수 있지만

오히려 과거보다 더 장벽이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국경선이 분명하고 여권과 비자가 있어야 다른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관광을 가는 것은 간단한 문제지만 이민을 가는 것은 훨씬 더 까다롭습니다.

하지만 고대에는 먼 거리를 이동하는데 시간은 많이 걸렸겠지만

민족간 교류가 적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 오늘은 소그드인과 고구려와 신라의 교류에 대해 얘기 해보겠습니다.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는 동서 실크로드를 연결하는 중심지인데,

사마르칸트 북쪽 교외의 아프라시압 언덕에서 7세기 중엽(650~655)으로 추정되는

궁전 벽화가 1965년 발굴되었습니다.

 

당시 사마르칸트에는 이란계 민족인 소그드인들이 세운 소그디아 왕국이 있었는데요.

세로 2.6미터, 가로 11미터의 거대한 궁전 벽화에는 소그디아 왕국의 바르후만왕이

각국의 사절단을 접견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12명의 사절단 중에 오른쪽 끝에 고구려 사신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

머리에 새의 기틀을 한 조우관(鳥羽冠)을 쓰고 손자루가 둥근 환두대도를 차고 있는 두 사람은

영락없는 고구려인입니다.

원래 우리 민족은 하늘의 명을 전하는 새를 신조(神鳥)로 신성시 했기 때문에

조우관을 쓰고 환두대도를 사용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조우관을 쓰는 전통은 삼국시대를 거쳐 조선까지 이어집니다.

 

그런데, 고구려에서 약 5000km나 떨어진 이곳에 고구려 사신이 무슨 일로 왔을까요?

궁전 벽화가 그려진 7세기 중엽은 백제가 멸망하고(660) 고구려가 멸망하는(668) 시점으로

그 전부터 당나라부터 상당한 압박과 전쟁이 있었던 때입니다.

그래서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압박에 대응하기 위해

특사를 이 먼 곳까지 보낸 것으로 추정합니다.

당나라 북방에 있던 돌궐이 당나라에 제압당했기 때문에 더 이상 가까운 곳에는

군사적 동맹을 맺을 수 있는 나라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 등장한 고구려 사신과는 정반대로

고구려와 신라에 살았던 소그드인이 있습니다.

바로 김춘추의 호위무사였던 온군해(溫君解)와 고구려의 온달(溫達)입니다.

온달은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이라는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고구려 25대 평원왕 때의 장군입니다.

 

온달은 원래 바보가 아니죠.

〈삼국사기〉 열전의 기록을 보면 온달은

‘얼굴이 파리(龍鐘)하여 우습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쾌활했다’고 나옵니다.

파리(龍鐘)하다는 것은 늙고 병든 모양을 뜻하는데, 한창 젊은 온달 장군이 늙고 병들었다는 것은

수긍이 안 되는 말입니다. 온달이 고구려의 일반 사람들과는 외모가 달랐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온’씨가 등장하는 것은 온달이 처음입니다.

그렇다면 온씨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중국의 사서를 보면 그 해답이 있습니다.

‘소그디아는 강국(康國)이라 불렸고, 그 왕족은 온씨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 기록상 온씨와 연결되는 것은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지역에 과거 존재했던

소그디아 왕국의 소그드인 밖에는 없습니다.

고구려에 온 소그디아 왕족과 고구려 여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온달입니다.

온달이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파리(龍鐘)하여 우습게 생겼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면, 온군해(溫君解)는 어떤 인물일까요?

신라 진덕여왕 때 김춘추가 당나라 사신으로 갔다 귀국할 때,

고구려군의 추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롭게 됩니다.

이때 종사관이었던 온군해(溫君解)가 김춘추의 옷으로 갈아입고 대신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김춘추의 생명을 구하고 충신이 된 온군해는 후에 대아찬에 추증되는데요.

이 온군해(溫君解)도 고구려의 온달처럼 소그드인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당나라에는 서역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한 지역이 있었다고 하고,

8~9세기 신라에도 서역인들이 왕래한 사실을 감안하면 얼마든지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신라의 원성왕릉으로 보는 경주 괘릉과 흥덕왕릉의 무인석상을 보면

이런 생각을 더 하게 됩니다.

왕릉을 수호하는 무인석상의 모습이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머리에는 이슬람인들이 하는 터번을 두르고 있고 눈은 움푹 들어가 있으며

코는 높은 것이 영락없는 서역인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 무인석은 의상과 허리에 찬 주머니까지 리얼하게 표현되어 있는데요.

전문가에 의하면 의상은 소그디아 스타일이며 허리에 찬 주머니는 ‘포체테’라고 하는데 이것도 역시 소그디아 스타일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왕릉을 수호하는 무인석을 소그드인의 모습으로

만들어 놓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 온군해(溫君解)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당시 신라인들은 이역만리의 서역인이 김춘추를 위해 목숨을 바친 기개에

큰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후대에 그 용맹과 충의의 정신을 높이 사서 왕릉을 수호하는 무인석으로

재탄생 하게 됐다고 봅니다.

이외에도 서역과 교류한 흔적이 여럿 남아 있는데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경주 구정동에 있는 사각형의 무덤인 방형분에서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폴로 채를 든 서역인이 조각된 부조가 출토되었습니다.

 

또한, 신라 49대 헌강왕 때 울산 개운포에서 나타난 ‘처용’도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고요.

4~5세기로 추정되는 고구려 고분인 각저총의 벽화에도 서역인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씨름하고 있는 벽화인데, 그 중 한 사람은 큰 눈과 메부리코로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우리가 고대에도 서역과 교류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흔적입니다.